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남 철수작전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|| [youtube(DggOaoM8no4)] || || 실제 흥남 철수 당시를 기록한 영상.[* 쇄도하는 중공군에 맞서 포 사격으로 후퇴를 엄호하는 병력들과 후퇴하는 [[유엔군사령부|UN군]] 및 민간인들, 파괴되는 흥남 부두의 모습이 전부 담겼다.] || ||그 날 아침의 배는 6시 15분에 닿았다.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~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이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. (중략)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.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,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,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, 찾고,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. '''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.''' ([[김동리]]의 소설 《흥남 철수》 중에서 인용) || 1950년 11월 말, [[북진통일]]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한 [[유엔군사령부|유엔군]]은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8군이 중공군한테 [[청천강 전투|괴멸적인 대패]]를 당하자 11월 30일 동부전선에서 호기롭게 북진 중이던 미10군단에게 함흥-흥남 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. 그와중에 미10군단 산하 미 제1해병사단이 [[장진호]] 일대에서 [[장진호 전투|중공군 9병단의 포위에 걸려]]('''장진호 전투''') 미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게 포위섬멸당한다는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12월 8일 흥남 철수 명령을 내렸다. 12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미10군단 전 병력이 흥남으로 집결, 해상을 통해 [[부산]]으로 철수를 시작했다. 이것이 '''[[1.4 후퇴]]'''의 전초전이었다.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함흥-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으며, 12월 9일에 중공군이 [[원산]]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. 즉, '''배로 철수하는 것 빼고는 [[함경도]] 등지에 위치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'''. 따라서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[[흥남항]] 부두를 중심으로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, 동해에 위치한 [[미 해군]]의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유엔군과 [[대한민국 국군|한국군]]은 철수를 준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